이만섭의 詩 文學
앵두나무/이만섭 본문
앵두나무
이만섭
우물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나무는
십 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다. 그사이 꽃 피고 열매 맺어
많은 입술이 다녀가고 닮으려 했건만 바람만 맞고
우물물은 모를 리 없건만 흘러넘쳐 장소를 다 떠나갔다.
물 긷는 하루가 저물어간 어느 봄밤 달이 차오를 때
누군가 나무 곁에 와서 사랑을 고백했다.
나무의 여린 꽃잎을 빌려 그립다는 말을 속삭였다.
닫힌 귀를 열고 들어간 그 사랑이 대답이라도 하듯 나무는
씨방을 짓고 바람을 불러들여 장마를 함께하면서
입술이 여물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익어
약속이라도 하듯 계절은 세상에서 가장 붉은 입술을 선물했는데
입술이 고백할 때까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우물가는 미완의 사랑에 빠지고 그립다는 말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아득해지는 꽃잎의 시간 곁에
심장이 뛰는 듯한 물소리가 귀를 열고
깨어나면 우물가에 앵두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사랑이 지나가는 것을 모르고 서성거리는 세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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