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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무청 이만섭 집 모퉁이 처마 밑 무청 시래기 한 줄 꼬들꼬들 푸름을 말리고 있다. 해찰하는 저녁 빛 꼬드기듯 가던 길 멈춰 기웃기웃 들러리 치는 건들바람에 초록 잎사귀 열일곱 소녀처럼 치맛자락 감추듯이 까르르 까르르 웃고 있다. 언제였던가, 푸른 파도 일렁이는 청무우 밭 건너올 때 천지간은 왜 그리도 아득한지 헤매고 헤매도 흰나비는 보이지 않고 지친 발걸음 주저앉힌 어깨에 날갤 달아주던 구원의 손길이 있어 계절에 저당 잡힌 꿈이 비로소 깨어나던 상강 무렵 서리아침을 데리고 떠나와 뉘엿뉘엿 자맥질하는 하루해를 배웅하던 저녁 길 붉은 노을이 서녘을 색칠하고 있었다. 한창이라는 날것의 때를 지나와 정성스레 건사하는 또 다른 한창이라는 숙성의 시간이 맑게 가라앉은 물 밑의 앙금처럼 투명하게 비치는데 청무우 걷어..
수평의 힘 이만섭 . 접시의 밑면처럼 수평 위에 올려놓은 것들 그것을 떠받치는 편편한 기둥들 모서리와 모서리가 일직선으로 마주 보며 영점에 머무는 저 식탁 위에 물컵은 물컵대로 유리판은 유리판대로 평면을 끌어당기고 있다 저 집중력은 누가 실행하는 중일까, 등을 켰을 때 어둠의 커튼을 올려 짠! 하고 나타난 사물들이 하나같이 수평의 물심양면에 기대어 있었다. 기립한 그릇들의 긴장을 풀고 교감하듯 물결쳐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은 액체가 고체화되어가는 접착력으로, 나와 당신이 두 손 마주 잡은 듯 숨결과 숨결이 고스란하게 머무는 트랙 위에 빛이 고요를 방목하고 있다.
낯선 골목 이만섭 어렵사리 찾아낸 골목에 풍경이 사라졌다. 하나둘 낡은 글씨를 지워버린 듯 앙상한 뼈만 남아 대답 없는 뒷모습처럼 무심하다. 담벼락의 귀가 두레박 우물물처럼 깊어 있어 끈을 내려도 팔이 짧다. 이 무료한 뒤꼍에 적막이 뒹구는 가옥들, 일상이라는 생활을 방목하다가 가축처럼 몰고 들어오는 문밖의 길목에 아이들은 언제부터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를 감추었을까, 더는 나 아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들여다보는데, 젊은 사내가 휘파람을 불고 있다. 물이 좋은 시절인 듯 등이 담쟁이처럼 파랗다. 아! 그렇구나. 솟아오르지 못해 서성대는 저만치에서 말과 말을 섞어 가며 마중하고 배웅하듯 도란거리는 소리가 손수레처럼 일상사를 싣고 달그락거리는 저녁, 기억에서 소실되지 않은 표정을 좇아 다감한 소리에 귀를 내주며..
눈사람 이만섭 밤사이 내린 숫눈을 밟고 새벽길을 걸어온 사내가 눈부신 아침햇살 아래 서 있다. 겨울 숲을 떠나 와 눈멀고 귀 먹은 그리움에 붙들려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화석이 된 표정으로 세속의 술래가 되어 있다. 천사라고 부르는 이름이 우리의 겨울을 하얗고 투명하게 색칠하듯이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잊고 온몸을 외로움에 바친 사람이 있다.
궁리의 세계 이만섭 다면체의 생각이 굴러간다. 트랙이 고르지 않아 모서리마다 정 맞으며 흔들리는 듯 구비치는 듯 나아가는 듯 소실점 없는 아득함으로 이어진다. 제풀에 겨우면 역습해 와 온갖 질문을 쏟아내며 티끌만큼의 유정도 무한하게 넓은 황무지에 울창한 밀림이 들어설 때까지 이끼 낀 고색창연이 배어날 때까지 낡고 닳아빠진 형상이 지워질 때까지 칠흑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원시의 나르시시즘에 다다른 원정은 바깥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커다란 동공을 발견한다. 그곳은 하나에서 열까지 속수무책이어서 무지와 미지가 숨결까지 파고든다. 돌덩이 같이 단단해진 내부를 향한 천수관음의 손길이 있어 앗! 하고 놀라 소리치는 사이 입 모양을 따라 둥글게 받아치는 대답이 사위를 찢고 나온다. 순간, 도망치듯 재빠르게..
보이지 않는 손이 공중을 보여주겠다며 그넷줄을 밀어 올릴 때 이만섭 바람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오거나 머리에 이어져 오거나 옷깃에 붙어 온다. 이편을 도모하며 저편을 꿈꾸며 투명한 액상에서 휘발되는 인화성 물질이 발화점을 찾듯이 가면의 얼굴로 깃든다. 바람이 오기 전 놀이터의 공허는 연 민과도 같은 미상未詳의 친애, 우두커니 멈춰선 그네의 발판 아래 어지러이 널린 발자국들은 해변의 백사장처럼 단색조의 나 르시스를 투영해놓은 듯 묵묵부답인데 미동도 하지 않던 그넷줄을 슬며시 잡아끄는 긴 팔이 목격되었다. 누구일까 봄 저녁도 아닌데, 라일락이 피었다는 전언처럼 숨죽여 엿듣는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는, 꽃나무 곁에서 분홍의 앞섶을 훔치는 정경이 자 꾸만 눈에 밟히었다, 밟히어 한속으로 난..
날짜를 짚다 이만섭 일월의 바큇살은 투명해서 굴러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싣고 있지 요철자국 없는 수레바퀴이건만 나날을 더해 계절을 맞이하고 나이를 헤아린다. 누군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딱 기억하기 좋은 새날을 기다리다가 오늘을 잊고 약속을 어긴 어제는 얼마나 많은가, 생활이란 끊임없는 명분들의 놀이터 오늘의 생각을 추스르다 들여다 본 달력에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 붉은 열매로 익은 공휴일의 숫자를 물고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계산된 날짜에서 멀뚱히 하루를 놓치고 허탈함에 투정을 부리는데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달력 속에 주저앉힌 숫자가 일월에 속은 패일까,
공기 이만섭 공기를 마신다는 기분이었다. 그래선지 세상이 새롭다는 느낌이 확 밀려오는 것이다. 마음이 닿지 못한 게 허공에 있었다는 듯 장대높이선수처럼 뛰어오르며 손바닥이 공기와 마주치는 표정이었다. 맑은 공기는 눈에 좋다. 아, 좋다 하고, 벌름거리는 코를 허공에 가져다 댔다. 나무가 저만치에서 물끄러미 치어다보는데 생색내다 들켜버린 듯 슬그머니 자세를 흩트리며 매순간 생명줄을 지켜주던 공기이기에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지나친 것을 겸연쩍어한 셈이다. 여하튼 맑은 공기는 눈에 좋다. 폐에 좋다는 말은 진부한 건강학적인 말씀 같아 혼자 중얼거린 말이 생각을 해방시킨다. 아마도 공기는 이런 개념마저 관심이 없는 듯싶다. 스스로 자유로울 뿐 텅 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공기이니까, 오직 공기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