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4 (61)
이만섭의 詩 文學
쉬는 의자 이만섭 휴일의 사무실은 사각형 흰 벽이 안락한 등받이다. 실컷 늦잠에서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도 누구에게도 구속될 일 없는 자유로운 시간의 휴식은 각별하다. 외출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양말짝처럼 홀가분하게 무게를 비워놓고 보니 왜인지 육체의 둘레가 허전키만 하여 습관이 원치 않는 나태함이 이런가 싶기도 해서 멀거니 대면하는 벽에 걸린 액자 속 바탕체로 쓰인 誠實을 우러른다. 일상이 앞을 가려놓아 저 말 내주고 더욱 몸을 혹사한 까닭에 정면에 적힌 성실은 세상에서 몸을 가장 편안하게 두어 바야흐로 쉬는 일에 집중하는 일 노고의 삯을 휴식으로 정산하는 오늘 사무실의 중심으로 앉아있다.
北窓 이만섭 아궁이방 아랫목에 붙들린 마음이 냉수마찰 같은 정신 하나 들여놓고 싶어 맑게 멈춰선 공활한 바깥을 기웃거리다가 더운 심장이 찬 이마를 불러내듯 귓불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체감을 나누듯 살얼음 낀 동치미 무 흰 속살의 와삭거리는 식감을 그대로 베껴놓은 겨울 윗목의 사서함에 막 도착한 문풍이 건네주는 한 호흡 생기발랄을 대면한다. 저편, 마른 풍경을 기둥 삼아 뒤란을 거느린 헐벗은 감나무에 붉은머리오목눈이가 바람의 길손처럼 머뭇머뭇 서로 견디는 것들끼리 위로하는 광경은 겨울 아침이 건네는 엽서 같아 등 뒤에 가로누운 아랫목을 말끔히 치운다. 허공에 그물처럼 걸린 빈 나뭇가지들 사이사이에 얼기설기 울림통을 들여놓고 간밤에 매운 바람결로 켜댄 비바체의 악기소리가 북창을 찾아온 음악회였으니 내 닫힌 ..
숲길에서 이만섭 강아지와 숲길을 산책하다가 나무 한 그루 눈에 밟혀 왔던 길 되돌아 가 그 나무 아래 멈춰 섰습니다. 숲의 갈피에서 빠져나온 청솔가지 고갤 내밀어 누굴 기다리는 표정만 같아 곁에서 그 누군가가 되어봅니다. 그 사이 강아지는 나무 밑동에 생리적 방점을 찍고 목줄을 끌어당깁니다. 때마침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나와 강아지를 환하게 비추어오고 우리 셋은 고스란하게 서 있었습니다.
손때 이만섭 일상으로부터 보내온 선물의 끈을 푼다. 이것저것 챙겨 넣은 생활의 도구들 칼이나 가위처럼 손잡이가 아래쪽에 있는가 하면 밥솥이나 냄비처럼 손잡이가 옆구리에 달린 것도 있어 제각각 사용하기 편리한 순서대로 색인까지 해놓았다. 그 가운데는 오래 전 내게서 빌린 서책 습관의 경전을 잊지 않고 부쳐왔는데 두툼한 페이지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하던 콘사이스영한사전 측면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있다. 써서 닳는 것이 있는가 하면 쓰면 쓸수록 정이 드는 것도 있어 어쩌면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겠는데 일상은 저리도 빈번한 손길로 애착의 자취를 남겨놓고 있으니 두고두고 기억하는 마음의 정표인 것을 어찌할 수 있을까, 습관이라는 손끝이 우려낸 자리마다 꼬깃꼬깃 접힌 흔적들, 긴 팔 뻗어 은근히 어루만져보는 것이다.
겨울저녁의 답장 이만섭 무심히 흘러간 흰 구름이 굴뚝의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날 저녁햇살에 비킨 나무그늘이 발등에 얹혀 쓸쓸함의 허기를 부려놓는다 맨손인 채 맨발인 채 기척 없이 당도하여 눈빛만 퀭한 겨울저녁 마른 손 휘휘- 내저으며 투명한 공중을 쫓는 어스름 마중하듯 하나 둘 빗장을 거는 시간 대숲에 깃든 새떼들 한월寒月을 건너가는 패라도 쥐고 있는 듯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아침에 이만섭 찌를 듯 하늘을 가리키는 깃대 하나 스테인리스 등걸이 햇살에 부딪쳐 눈부시다. 아직 깃발을 올리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간 하나 둘 모여드는 맑은 눈동자들 포르르 날아오르는 참새 한 마리, 저 작은 날개가 하루를 여는 깃발일 수도 있겠다.
이끼의 탄생 이만섭 바람을 떠나와 계곡을 헤맸어, 발길 닿는 곳마다 달아나는 고요에 숨을 죽이며 기꺼이 맨발인 채 길을 재촉했어, 비탈에 허리를 동여 등신불이 된 강대나무에 까막까치가 울다 날아간 곳으로 숲이 깊어지면서 회색 동굴이 열리기 시작했어, 어둑하게 패인 산그늘 아래 커다란 바윗덩이가 원시를 품에 들여놓고 천년의 주문을 외우는 중이었어, 모로 재어 봐도 외길뿐으로 수행인데 풀섶의 민달팽이처럼 소리 없이 몸을 내렸어, 여정의 노독에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외떨어진 산 하나가 가옥을 에워싼 울타리가 되어 입김을 올리듯 이내를 촉촉이 몰아오고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는 표면들로 가득 채워진 사방 바윗덩이의 표면에도 다정이 배어있던지 가뭇없이 고요에 기대어 젖은 몸을 부풀리는데 나도 모르게 살갗에서 새싹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