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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매지구름이 산벚나무를 굽어볼 때 이만섭 흰 염소 떼를 몰고 오듯 안개를 저어가며 산이 골짜기를 내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로 집들을 거울처럼 비추며 우렁우렁 황소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산이 우는 걸 처음 들었다. 무논에 든 일천 마리의 개구리가 일시에 울어대도 이겨내지..
저녁의 사색 이만섭 새들 돌아가고 나무 어두워질 무렵 생각에 잠기는 집들이 태어난다. 어둠속에 부챗살 같은 손을 펴 숨어 있는 외로움까지 품에 끌어들인 별빛들, 낱낱의 등을 쓰다듬는 듯한 촉감이 견딜 수 없이 눈부신데 불 켜진 집들의 창은 눈동자같이 골똘하기만 해서 저 홀로 내..
난롯가에서 이만섭 몸을 붙들어 의자에 앉혀놓고 보니나는 묵묵히 겨울을 지키는 사람 혹한에 맞서는 불빛 너머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만난다. 이 따뜻함을 받자니 도란도란 불을 피워 유리걸식하는 추위를 녹여줄 인정으로나를 붙들어놓은 것인가, 말 없는 나는 문밖에 들어선 흐린 하늘이행여 흰 눈옷이라도 입힐까 봐 주전자를 들어공손히 차를 따라 올린다.
가짜신선타령* 이만섭 나는 그리움을 많이 탑니다. 그래선지 천애고아처럼 외롭기도 하고요. 이것이 시를 쓰는 이유입니다. 세속에 줄을 서듯 밥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건너가는 하룻길, 그런 저녁의 우편함은 텅 비어 내 일상의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지요. 하기야 아무것도 읽어..
습관은 어떻게 몸속에 살고 있나 이만섭 도망친 자가 되돌아오는 것을 목격할 때, 그는 가까스로 제 묶인 끈을 풀어 달아났건만 구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잘못을 뉘우치듯 고갤 주억거리며 제 안으로 걸어온다. 멀리 가봤자 새로울 게 없는 발길은 알고 보니 자신을 맴돌았다. 오랫동안 ..
그것 이만섭 당신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춰 있다. 이목이 이동해간 중심에 눈 맞추는 나는 그것이 무어냐고 묻는다. 하지만 당신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손가락 끝에 올려놓았을 뿐 더는 묵묵부답이다. 그래서일까, 당신의 손가락이 지워질 때까지 외투를 껴입은 허수아비처럼 더욱 돌올..
기다리는 사람 이만섭 그는 언제나 옆모습을 비추인다. 바람이 옷깃이나 머리카락을 스칠 때 거리낌없이 비켜가도록 그런 그가 나뭇잎 같은 발걸음으로 와서 등 뒤에 붙들려 있다. 이목구비 한쪽이 가려진 그를 볼 때 나는 내가 떨어뜨린 그림자를 생각한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는 ..
사람의 옷 이만섭 옷들이 움직일 때 찬찬히 들여다보면입었으되 벗은 옷과벗었으되 입은 옷이 뒤섞여 있다. 저 군청은 시푸른 난바다에서 건져 올린 근육질 색감저 분홍은 수수꽃다리 배웅하는 가을저녁 먼발치에서 손짓하는 무늬저 하양은 제 살 돋아 맑은 빛으로 직조한 빛깔 제각각 솔기를 감춘 피륙 그대로광장의 깃발처럼 드높이는데, 그 가운데서도수선집 바닥에 떨어진 천조가리처럼 남루가 베인 모습으로자신을 감추려 두터운 외투를 두르고빛이 실루엣을 투과하는 창에몸을 보여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아, 저 옷은 사슬인가, 입었으되 발가벗은 몸을 가리지 못해또박또박 받아먹는 눈총인가,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세워놓은 채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불쑥 자화상이 된 ..
蒼天 이만섭 한 시절이 도래했으니 옛 시절은 어디인가, 사방천지 둘러봐도 세울 곳 없음이여, 비워낸 건 여름자리뿐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치솟던 별자리의 눈빛도 높새 위에서 솜사탕처럼 부풀던 구름도 드맑은 호수에 잠기고 광야처럼 무작정 달리는 하늘아, 저 무구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