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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북향집 이만섭 개울 건너 북향집엔 누가 살까, 마주 보고 있어도 돌아앉아 있는 듯 종일토록 주인은 보이지 않고 그늘에 기대인 높은 지붕이 교목들과 키재기를 하는데 흐린 날 나무 끝에 날아온 까마귀가 안부를 묻듯 기웃거리면 돌담에 핀 이끼가 장막을 친다. 낮 동안 등걸이 따뜻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일까, 저녁 해 넘겨 먹은 서쪽이 지워질 무렵 밤하늘에 찍히는 은빛 소수점들 어둠 속 창문이 재빠르게 들어앉힌다. 아득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별빛에 얹혀오면 날빛이 읽어주는 풍경에 관한 것보다는 그늘에 가려진 소소하고 사적인 것들이 궁금해진다. 겨울 자리에서 깨어나면 올봄에 정원은 어떤 꽃이 깃발을 먼저 꽂을까, 바람에 날아다니다가 돌부리에 걸려 파닥거리는 찢긴 비닐봉지의 황량한 몸짓조차도 그 정신이 깃든 강대..
하염없다 이만섭 화면 속 여자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길이 불빛에 반짝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헤엄쳐 오듯 이랑이랑 이는 물 주름에 나도 모르게 젖어 흠칫 놀라 고갤 돌리는데 창밖에 흰 눈이 펄펄 내린다. 눈물은 자랑이 아니어도 자랑처럼 흰 눈은 자랑스러운데도 자랑이 아닌 것처럼 하염없음에 이끌리다가 돌부리에 차인 듯 화들짝 깨어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눈물 없이 살아왔던가. 그동안 나는 얼마나 메마르게 살아왔던가. 순정하게 흐르는 눈물과 펄펄 내리는 하얀 눈의 하염없음이 마음을 우두커니 붙들어놓고
계단 사이에서 이만섭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지나서 모퉁이 계단을 오른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동안 계단의 집합체에 갇힌다.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 계단에서 헉헉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사람을 비켜 가면서 참새 종아리처럼 종종대던 발걸음인데 오늘은 계단을 탓하는 내게 계단의 모서리가 차가운 눈초리다. 저울추처럼 공평하게 발걸음을 받쳐주던 태도임에도 손에 든 가방의 무게를 투정하다가 과부하가 걸린 듯 몸을 십 층에 세운다. 맞배지기로 비춰보는 난간이 평면에 굴절된 그림자 하나 꺼내 든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층계를 오르다가 발부리를 놓친 자가 패배의 모습으로 꽂던 눈총을 무슨 과실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바닥의 감정을 조용히 수습하던 광경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계단 아래 계단을 계단 위에 계..
이곳 이만섭 이곳을 비추고 있다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드러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늘이 들면 발등부터 덮이는 빛과 그늘을 나누어 갖는 습성이 있지만 내겐 쳇바퀴 속이 아니었으면 마침내 다다른 곳이 아니었으면 모든 계절을 데리고 와 익히 알던 비바람도 구름도 달빛도 어떤 이름으로 고쳐놓고 새로 사귀기 시작하는 내가 있다 제 얼굴을 볼 수 없는 거울일지라도 머무는 시간을 휴일처럼 둥글게 거둬들이며 천 개의 눈동자가 꽂힌 표정으로 대상을 새롭게 대한다 새는 노래하고 싶어 나무에 깃들고 꽃은 자랑하고 싶어 색을 입으며 그럴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고 희로애락조차 풍경으로 드리우는 형형한 눈빛이 독립된 발광체로 깨어나는 아침 돌멩이는 돌멩이대로 풀포기는 풀포기대로 이곳을 지켜내느라 여념이 없는 저곳으로부터 에..
어둠 사이 빛이 이만섭 화선지의 바탕색을 지워가는 붓질의 이동 경로를 따라 둥글게 갇힌 흰색 부분이 놀란 눈동자처럼 더 환하다. 붓질에 에워싸이기 전 그저 어둠이나 다름없던 화선지가 눈썹 깜박거리는 흰빛으로 태어난 것이다. 스스로조차 몰랐던 어둠을 벗고 밝음 속에서 밝음을 잊고 있던 시선으로부터 발견한 새로운 빛의 형식으로 창틈을 뚫고 들어앉은 볕뉘처럼 흰색은 파수꾼 같은 먹색에 둘러싸여 독립된 숨결로 오롯하다.
겨울 저녁의 노트 이만섭 누가 올 것만 같다가 저무는 하루 저녁이 먼저와 기다린다. 그런 마음이 해종일 이어지는데 긴 팔을 뻗어 에워싸듯 둥글게 휘감는 어스름의 실루엣 잠자코 마실 간 생각을 마중하다가 슬그머니 손 내미는 연민이 있어 아침나절 장독대 위에 올려놓은 새 모이 좁쌀이 그대로인 채 종일토록 새를 기다린 자리가 무성하다. 누가 올 것만 같다가 저무는 하루 마음조차 물려놓기 아쉬운데 이 저녁 밤눈이라도 내릴까 봐 새 모이 접시를 거두어들인다.
나를 가로막는 詩와 대치하다가 이만섭 오늘도 나는 나를 방어하느라 흥분한다. 어제와 오늘이 죽이 맞아 한패를 먹고 나의 길목을 가로막는 시 때문에 나는 나의 경계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말인즉 시는 그렇다. 이편의 나는 내가 쳐놓은 오래된 생의 그물망이 낡아 사용할 때마다 녹슨 부위에서 부서져 내린다. 한 그루 나무가 뻗어 올린 나뭇가지에도 이편은 삭정이이고 저편은 졸가리로 나누어져 있어 눈동자 멀뚱한 창공에도 경계선이 그어져 이편에서 날갤 접었던 새가 저편에서 날고 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물러설 뜻이 없는 거라며 시는 대변한다. 그대는 여전히 문외한이군요. 처음 본 거울을 손에 쥔 아기가 그것을 뒤집어보듯 낯선 유희를 좇는 게 전부이군요. 어떤 충고도 먹혀들지 않는 이기적인 체질의 어..
눈보라 이만섭 때로 오염된 세속을 지우고 싶을 때 겨울은 강철로 된 빗장을 풀고 아득하고 황량한 북방의 하늘길 열어 초원이 양 떼를 몰듯 눈보라를 데리고 온다. 삽시간에 백만 마리의 되새 떼가 몰려와 날갤 파닥거리듯 분분함으로 요동치는 공중이 한 마당 장단 없는 춤사위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 제자리에 멈춰놓고 줄기차게 달려오는 눈보라 세상 모든 것들 혼자 있게 해놓고 떼를 지어 몰아치는 눈보라 구상나무 붉은 열매를 쪼아대던 오목눈이가 재빠르게 눈보라 속을 관통한다. 어둠보다 먼저 저녁을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른어른 흐려진 풍경 사이로 금세 지워진 새의 자취 하얗게 물러선 담벼락이 은산철벽으로 세워지고 서로 관조의 눈빛을 나누는 사물들 겨울이 깊다는 말은 이쯤에서 열리는 터널 속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