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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화장지 /이만섭 본문

시 6

화장지 /이만섭

이만섭 2024. 5. 9. 21:47

 

 

화장지

 

 

                 이만섭

 

 

새신부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하얀 드레스 위에 피어난 부케 같은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며

쳇바퀴 속 다람쥐를 연상하다가

삶이 셋방살이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허겁지겁 찾아간 곳은 알전구 희미한

몽상의 방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울기 좋은 방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이 위안이 되는 것은 눈물을

닦는 손이 있기 때문인 것을 처음 알았다.

쪼그라져서 볼품없던 생각은 비행선처럼 부풀어져

머리통 위를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는데

하나씩 불러오는 미제의 기억들이

발광체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몽상의 끝은 어디일까,

처녀 적 대청마루에 앉아 맷돌을 갈다가 떨어진 콩알

또르르 굴러 마루판 틈새로 들어간 사연은

지금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 생명체가 굴러간 사연이 전부인데

아직도 밀알로 남아있는 것일까.

이번 생은 구르다가 더 이상 구를 일이 없어질 때

끝장날 것이 자명할 것인데

무언가를 정화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스스로 내세운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새신부의 눈물까지 닦아주면서

이타적인 내력으로 굴러가는 자화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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