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의 詩 文學
움시 동인 3집 발간에 부쳐 본문
『움시』동인 3집 발간에 부쳐
그 어떤 것도 詩 위에 놓일 수 없는 것이 시인의 시정신이라면 이 확고한 바탕의 優位에서 획득된 시는 두말할 것 없이 玉稿라 할 것이다. 시는 그만큼 삶의 경험을 고양 시켜 새롭게 재구성하는 문학형태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경험을 드러낼 때 직관을 사용하지만 그렇지 않고 간접적인 형태일 때 더욱 객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일인칭인 내가 나를 호명하는데 삼인칭이 되어야 하는 것은 더욱 절실한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의 관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직관을 좀 더 참다운 모습으로 걸러내기 위해 자의식을 통해 제시되는 환치의 언어는 예삿말이 갖는 고루함으로부터 형상화되고 상징된 의미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 은유적 구성의 結晶이 시의 참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이제까지 서정의 근간은 전통이나 환경, 사물이나 풍경, 또는 아름다운 감정의 첨예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적 동력은 어느 사이엔가 새롭게 脈을 달리하면서 시인 개인의 삶을 존중하게 되었다. 곧 그 삶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우리의 시가 정형화된 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 시의 영토를 넓혀온 소이연이다. 의식이 작품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진정성의 증언이며 새로운 시학이기도 하다. 이상적인 것을 좇는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사명과 같은 행위이며 그 관점을 통해서 시적 위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이 크면 슬픔을 노래하여 슬픔 특유의 문자로 형상화 된다면 그 실체가 갖는 見成이 오히려 따뜻한 파란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른 이치가 아니다 슬픔의 공명현상일 것이다. 자신을 쓴다는 일은 그만큼 소중하며 스스로의 생을 추스르는 바로미터이기에 우리의 시는 어떤 경우에도 시의 우의를 그 무엇에도 양보한 적 없으며 양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축으로 자리매김이 되지 않으면 내성의 약화현사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움시의 도모는 이와 같은 시의 적바림행위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결국 문자를 통해서 책으로 완성된다는 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시 또한 예외일 수 없기에 이 소중한 정신자산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시를 써왔고 또 쓸 것이다. 2집 발간 이후, 한 해 동안 단기필마를 채찍질하여 달려오듯 써온 시편들을 엄선하여 놓고 보니 객관의 무게가 실린 뚜렷한 성찰의 등가물임을 실감케 한다. 이제 시가 소수인의 산물로 취급받던 시대는 지났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인도 독자도 소통을 통해서 의미를 나누고 나아가서는 삶의 질을 나누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시는 어떤 유파에도 치우칠 수 없다. 오직 꿋꿋이 쓰는 행위야말로 시의 본질이고 시의 사명이다. 아시다시피 시인에게 좋은 시는 학문처럼 연구해서 얻어지는 산물은 아니다.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정신과 육체를 응집시켜 이루어지는 체현이다. 모두 애써 이루어낸 옥고에 삼가 고개 숙인다. 덧붙여 새롭게 동인에 합류한 시인님들께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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