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의 詩 文學
오명선의 시「오후를 견디는 법」평설 /이만섭 본문
오명선의 시「오후를 견디는 법」 평설 /이만섭
오후를 견디는 법 /오명선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詩로 여는 세상》2011년 여름호
탈 자아를 끌어올리는 힘
시간이라는 개념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현상과 상응관계 속에서 존립한다. 영원이나 불변 같은 고착화 된 형식이 아닐 때 이 무한한 흐름은 상존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은 카오스를 다스리기 위해 찾아낸 개념이며 질서이기도 하다. 더욱이 시간은 생명의식으로 드러날 때 영혼의 것이 아니라 육체의 것이라는 사실이며 육체는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실체를 보인다.
오명선의 시 ‘오후를 견디는 법’은 표면적으로는 자아와 탈 자아의 간극에 놓인 시간을 다루고 있지만 시간이 공간을 묘사하는 환유법적 전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자의 객관화 된 자아는 오후라는 공간에 끊임없이 사역되고 있는데 시종 억제된 자아와 대립개념에 놓인 공간적 상관물에 대한 탐색이 인상적이다. 이 같은 유폐된 설정은 내적 공간을 사물과 밀착 시키는데 효과적이며 정서적으로 한 편의 에피소드를 이뤄낸 시적 성취는 언술의 장력에 앞서 성찰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객관화된 자아를 자각하는 일일뿐더러 감정 속에서 감정을 벗는 일이어서 오후라는 공동체의 공간이 화자만의 지각된 개념의 표징으로 몸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이를테면 사물의 배후가 경험적 서사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낡은 소파만큼 따분한 오후의 공간은 화자의 불가피한 생의 접점이다. 얼핏 보기에도 무기력에 빠진 듯 유체이탈의 측면으로 보이겠는데 이 자의식은 화자가 설정한 공간적 현상이 사물과 동화되어 지극히 침전된 일상으로 서술되고 있는 점이다. 현관문이 '외출중'을 붙잡고 서있다는 시구나,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라는 언술은 부재의식을 더욱 부추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무기력함의 공시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화자가 사물에 편승하여 감당하는 또 다른 몫이란 오후라는 공간을 내면에 끌어들여 심리적으로 증언하려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러나 견딘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침울한 정서는 궁핍한 자아의 활로를 모색하는 공간적 설정이며 이미지시의 또 다른 형식으로 시의 힘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끈기 있게 돌파구를 찾아가는 과정의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후의 일반적 개념은 낮 시간을 둘로 나눈 한 축이지만 이 소극적 공간이 자아와 결부되어 요소요소 숨어 있는 내면을 탐색하기 위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나, 라는 존재가 대응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나의 관심사는 구원이나 절망 같은 생의 응집력에는 반한다. 나는 현상의 이해를 조력하는 방관자일 뿐, 허락되거나 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 오후의 정서는 일상 속에서 시간을 풀어내는 것인데 화자의 오후는 그런 속성과는 별개의 닫힌 정체성으로 사뭇 일탈된 패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속에 화자가 취하는 오후는 견딘다는 측면에서 보면 참는다는 일보다 더 깊은 내홍에 직면해있다. 빛이 차단된 무위의 오후는 사뭇 폐쇄적인 굴레일 수밖에 없다. 철저히 고절한 이 공간적 벡터는 내면이 깡그리 표면에 침식되어 있다. 적어도 화자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풍경인데 수동적으로 읽히며 낡은 소파, 외출중, 방전, 어긋난 문법, 적막의 두께까지, 객관화된 정서는 하나같이 정물적 자아를 대변하고 있다. 이 같은 무기력을 견디며 도달한 접점에 과연 객관화 된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완성된 하루가 기다릴 것인가. 그렇다면 그곳은 어쩌면 생의 피안일지도 모른다.
곧 오명선이 드러내려 하는 오후의 개념은 공시성의 존재를 질곡하고 있는 다양한 현상이나 상황을 은유적으로 존치시킴으로서 인식의 전환을 모색하려는 몸짓인데 시의 마지막 행간에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라는 시구는 일련의 정체된 자아를 나직이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창밖이 아무리 화창하드라도 유장한 풍경이 자아와 단절된 공간이라면 풍경은 화중지병인 것만은 자명한 일이다. 적막한 서사가 팽배한 가운데 어떤 심각성도 드러내지 않고 설정된 노정을 탐색하듯 심리적 지표를 담담히 그려놓으며 이미지를 다루는 시인의 묘사력은 감상자를 탄력 있게 끌어들이며 무기력을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연역적 정서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무엇을 꿈꾼다고 할 때 그 꿈꾸는 일이란 현실과 심리의 괴리감을 극복하는 과정이아야 하며 이처럼 내면의 고절이 자성과 결부되어 표면장력에 이를 때 갈등은 성찰에 이르는 것이며 존재의 자리는 모멘트로서 새로운 도약점이 될 것이다.
월간<우리시> 2013.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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