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이만섭의 詩 文學

나의 시, 나의 詩論 /이만섭 본문

시 읽기, 기타

나의 시, 나의 詩論 /이만섭

이만섭 2013. 12. 19. 20:25

 

 

나의 시, 나의 詩論

 

                    -잡혀지지 않는 시를 찾아서

 

 

 

  시가 내게 어떻게 왔는지 생각해보면 아슴아슴하다. 처음에 어떤 호기심으로 온 것은 아니었나 싶다. 중 2때, 친구에게 표지가 떨어진 “하므렛”?이라는 제목의 책을 빌려 읽고 매우 심란했다. 내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서가 아닌 문체였기에 불온서적처럼 몰래 읽었다. 감동보다는 연극 같은 줄거리며 주인공의 고뇌어린 갈등이 빚는 완곡한 묘사는 이국의 풍경을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듯 처음에는 시로 오지 않았다, 시로 오기까지 살아온 이야기가 누적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먼 길을 걸어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시를 알기 전, 시라는 형식은 무뚝뚝했다. 언변도 없고 친절하지도 않았으며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그 이후에도, 외우듯 읽혀지는 시조차 편리한 형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객관성을 무시한 지극히 주관적인 넋두리 같은 모습들이어서 쉽게 다가가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표면이 깊이로 숨어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겠지만 하여튼 시는 실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집착의 문장처럼 보여지기 까지 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런 넋두리와 쉽게 사귈 수 없었으며 또한 나를 연계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그런 사람도 없거니와 그런 마음 또한 더더욱 아니어서, 저 신파적이고 단도직입적이지 못한 문장은 내숭이거나 자기도취이거나 불투명한 미혹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습작시절은 그런 정서와 상관없는 소통을 끼적이고 싶었던 것이다. 가능하면 슬픔이 아닌 것으로, 기쁨을 드러내는 데 웃음만으로도 족하다는 착각처럼 그럼에도 나의 끼적거림은 고를 수는 없었다. 그 무렵 헤르만 헷세의 “시타르타”를 읽고,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읽으면서, 내게 새로운 미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막연한데도 소통하는 듯한 그런 것들이 내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와 시적인 것은 분명히 다를 테지만 .마치 시를 향한 수순을 밟듯이 시적인 것들이 찾아온 것이 그때였지 않나 생각한다. “시타르타”는 충분히 그랬다. 자아에 관한 갈등을 다루며 대립적 관계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체험의 형식으로 풀어가는 고백적이며 자전적인 문체가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과 화해하지 않고는 진일보한 삶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방식을 제시한다. 인생의 다채로운 경험은 삶에 있어서 또 다른 창조였던 것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꿈이나 청춘, 사랑, 동경, 같은 것에 대해 미지와 궁핍으로 가득 차 있었고 미메시스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타르타”는 내가 찾은 “시타르타였으며” “푸른 꽃” 또한 주인공 하인리히의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한 “푸른 꽃”에 다르지 않는 나의 길이었다. 사실 그 시절은 모든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고 싶었다. 이들 책은 소설의 줄거리를 가지고 왜 내게 시를 이야기했던 것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새 시를 읽고, 마치 “푸른 꽃”의 주인공이 ‘마틸데’라는 여성과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야 불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목에서 나의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문학의 가능성을 찾아낸 시점은 아니었다. 관찰자로서의 발견이었다. 꿈에 대한 인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현실은 괴리감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꿈은 오지 않는 것, 그렇기에 다가가고 싶은 것, 그럴 바에야 잰걸음으로 좇는 게 좋을 듯싶었다. 오지 않는 것을 몸소 찾아 나서며 지금까지 걸어왔다.

 

  누군가 시는 그 무엇과도 더불어 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늘 더불어 있었다. 내가 찾아 갔을 때 나를 기다린 듯이 나와 더불어 풍경을 이야기하고 생각을 대변하고 나의 열정을 인정해 주었지만 분명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뜻을 받들어야 옳았다. 그런 까닭에 나의 시는 대상과 화해의 형태로 드러난다. 존재하되 부재하는 것까지도 이 같은 바탕 위에서 행해지는 표현방식이다. 시의 언어가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두 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양분된 비율은 별개이며 내가 선택한 대상에 대해 나 자신이 먼저 고백하여 대상의 말문을 열게 하는 점층적 구조 속에서 고백과 상상력을 갈마들며 이미지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시가 아무리 이상적이라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놓칠 때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이 소통의 문제이듯이 열망의 방식 또한 어떤 실체가 관념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시적 대상을 내면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대입 시키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돌이나 바람 구름이나 산 나무나 꽃, 등등은 변함없는 배경이지만 단순 배경이 아닌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내어 나의 고백을 심화시킨다. 내가 꽃을 보았을 때 꽃 또한 나를 보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꽃으로부터 전해 받는 감정을 해독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꽃이라고 왜 말하고 있는가, 라는 꽃의 원칙과 나의 변칙 사이 간극을 해소할 때 내가 찾는 꽃의 실체가 더 분명해진다. 물론 남들이 인식하는 꽃이 아니어서 빛깔이나, 모양, 크기, 아름다움까지 일반적인 것을 해체하고 꽃을 대하는 시점이나 이유를 내 방식으로 편재하는 이기주의의 시다. 시에서는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본질도 될 수 없다. 어떤 상관물이라도 이미지에 부합되어야 시의 생명력을 지닌다. 꽃이 안녕할 때 나는 그때의 의미를 받아 적지만 시인이 독단의 기록자가 될 수 없듯이 꽃을 조력해주는 변증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함께 시의 영역을 공유하며 누가 힘이 샌지 겨룰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갈피를 드러내기까지 화자가 어떻게 사용하는 지가 문제다. 곧 존재하되 부재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행위다. 요컨대 시가 되기 전 객관적 대상일 때 사물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지만 시로 선택 받은 이상 아무리 좁은 틈이라도 신생의 공간성을 지닌다. 그곳이 의식이 꽂힌 지점이다. 선택된 대상은 대상 그 이상이다. 늘 있는 것인데도 새롭게 열망과 축복 속에서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나의 시의 모습이다.

 

 

*『시와 표현 2014 봄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