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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펌]2011년 문학나무 선정 『 젊은시』 이만섭 시인의 작품 평설 ‘직선의 방식’ 외 4편 본문

시 읽기, 기타

[펌]2011년 문학나무 선정 『 젊은시』 이만섭 시인의 작품 평설 ‘직선의 방식’ 외 4편

이만섭 2012. 1. 23. 16:39

 

 

* 이만섭. 전북 고창 출생 2010년「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

 

 

 

직선의 방식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당선작 -

 

 

 

푸름의 시간

 

 

 

북한강 물 보러 가는 길에 청평에 든다

산도 물도 온갖 푸른 빛

더는 지나칠 수 없어 물 등을 타고 앉듯

강물에 손을 적시니

손등에 잎맥처럼 번져오는 푸른 물줄기

강에 어린 민낯에도 물이끼 같은 푸른 빛

금세 건져 올린 손에서 뚝뚝 푸른 물방울 떨어진다

조약돌 하나 움켜쥐고 물수제비를 띄우니

푸름에 겨운 듯 청,청,청, 화답하는 소리

푸른 산이 강물에 응결될 때까지

내 마음이 벼른 것도 푸른 물색(色)이었다

긴 가지 수면에 치렁치렁 내려

돛배를 젖는 버드나무

청파로 이는 물결에 귀 대이고 있다 

나무 아래 잠시 마음 묶이니

어느덧 나는 *유하백마가 된다

강상을 건너오는 훤훤바람에 들풀들 드러눕고

물결에 떨어뜨린 흰 말의 깊은 눈매여,

그대 그리움 어느 곳을 향하는가

나의 고삐가 나무의 물관에 닿으니

갈기처럼 일어서는 마음이어라

푸를 때로 푸르러져 이두수(二頭水)를 향한 물길

그르메 같이 내 가슴에도 번져 와 

저녁이 올 때까지 붙들어놓고 있었다 

 

 

* 柳下白馬圖

 

 

 

 

꽃들 

 

 

 

`꽃들`이란 말

이 아름다운 낱말 속에 숨어 있는 이름들을

나는 낱낱이 호명하지 못하고

그냥 꽃들이라는 단음절어로 부를 때

그 지순한 꽃마음을 생각하면

무성의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모둠 해놓은 말인 듯 꽃들이라고 부르는

이 흔연스러운 기쁨을 어쩌랴,

우리의 일상은 나무도 돌멩이도 앞 냇가도

비로소 꽃들로부터 환해진다

그 섬약한 손길이 닿지 못할 때

햇빛은 어떻게 나무의 열매를 지을 것이며

바람은 무슨 흥으로 불어올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좁혀지고

그 눈빛마다 생기가 도는 것도

꽃들이 완충지대로 놓여 있는 까닭이다

산자락 휘감아 아름 동인 푸름과

강물에 물줄기 건네준 시원에 이르기까지

꽃들의 의미는 닿아 있다

샘이 솟고 새가 노래하는 이유가

꽃들이 피고 지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니

저 어두운 밤을 달려 다다른 아침

가슴을 깨우는 강물이여

말간 낯으로 피어난 꽃들이 눈부시다

 

 

 

부드러운 칼

 

 

사과를 깎다 보면

과도의 예리한 날이 육즙을 즐긴다

 

칼은 한 마리 활어처럼  

스륵스륵 과육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은근히 피워내는 사과 향기

주변이 오롯하다

 

제 몸 베이면서도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는 사과의 짜릿한 비명이

환하고 둥글게 피어난다 

 

상큼한 맛을 즐긴 칼은

이윽고 사과의 몸을 빠져나와

포만감에 겨운 듯 소반 위에 드러눕는다

 

꽃 핀 자리처럼

눈부신 사과의 속살 지어놓고

달콤한 육즙에 젖어  

자르르 윤기 흐르는 과도의 날

 

그 견고한 부드러움

 

 

 

겨울의 깊이 

 

 

외출에서 귀가하는 저녁

목덜미를 움켜쥐는 바람손을 뿌리치다가

누에섶을 올리는 천지간을 본다

나무들 벌거벗은 채 뿌리를 껴입고

깃털을 부풀려 서녘을 나는 새떼들,

바람에 날개를 달아주고 지층에 바짝 엎드린 허허벌판이

폐사지의 기왓장처럼 검게 그을렸다

시시각각 이는 생각들 좇는 저편

지평의 끝은 징소리도 닿지 않을 듯

낮아진 것들은 동면에 들고

높아진 것들은 아득하여 정처 없다

나도 나의 저녁에 닿으면

빗장을 걸고 아랫목을 차지하겠지 

그런 저녁은 함박눈이라도 내려

황망한 사위가 한 점 자취 없이 잠기어

기억 한가운데로 고스란히 내려가서

아슴아슴한 추억들을 풀어놓고 뒤적거리다가

그만 적막으로 덮여갔으면,

그리하여 어슴푸레한 시간으로부터 점차 뚜렸해지는 음각들,

그렇게 동면으로 한 몸 궁리에 들었다가

봄이 오면 적막의 껍질을 벗고

씨앗처럼 깨어났으면

 

 

 

 

<선정위원= 작품 평설:>

 

예리함과 섬세함에 대하여

 

 

이만섭의 시는 신인답지 않는 견고함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의 시에서 성숙되지 않는 시상이라든가 미욱한 형식을 그의 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간혹 이러한 시적 견고함이 신인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시의 상투적이고 인습적인 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에서 던지는 관례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신인의 시에서 이러한 견고함이 상투적이고 인습적인 차원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시 형식이 신인의 시에서 발견된다면 그것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섭의 시에서 이러한 익숙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의 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질 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섬세한 감성이다. 가령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인「직선의 방식」을 보자, 직선이 "천성이 분명하고 바르고 기껍다" 는 시인의 표현은 다분히 상투적이고 인습적인 발언이다. 이 대목만 놓고는 직선의 방식이 참신하다거나 낯설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은 직선의 방식에 대해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단겨 있다

 

 

라고 말한다 시인이 상상한 직선의 방식이 상투적이고 인습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생경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상상한 '지평선' 이나 '눈빛에 비친 별빛' '빨랫줄' 에 서의 직선의 모습은 우리가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러나 평소에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을 들추어냈을 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질료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렇게 은폐되어 있는 직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들추어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 시에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시인의 모습인 것이다.

  직선의 방식에 대한 시인의 발견은 우선 감각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지평선이나 눈빛에 비친 별빛, 빨랫줄에서 직선의 모습을 포착한다는 것은 감각이 예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감각은 단순한 느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느낌을 인지하고 그것을 이해와 판단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시인에게 필요하며, 이 능력의 정도가 시의 미적인 세계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것' 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직선의 힘' 을 떠올리는 것은 예리한 감각이나 섬세한 감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너날 수 없는 일이다.

 

  시인의 이러한 감각과 감성은「푸름의 시간 에서도 빛을 발한다. 시인은 강물에 드리워진 버드나무의 가지를 보고 여기에서 '柳下白馬圖' 를 떠올리고, 그 백마의 그리움까지 읽어내는 감각은 강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시인의 마음이나 생각을 흐르는 강물에 투사하는 감각은 늘 시인들이 행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이 천의무봉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시인의 감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을 다른 어떤 시편보다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부드러운 칼」이다. 그중에서도

 

 

제 몸 베이면서도 어느 한 곳

상한데 없는 사과의 짜릿한 비명이

환하고 둥글게 피어난다

 

 

는 대목은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메타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천의무봉함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인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는 '사과' 와 다르지 않다. "제 몸을 베이면서도 상한 데가 없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이며, 이 역설이야말로 시의 미학적인 원리 중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베이면서도 상한 데가 없다는 것인가? 이 모순과 역설 속에 세계 이해의 진정한 의미가 은폐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시인의 시 쓰기에 대한 메타포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시에서의 역설은 애매하고 복잡한 세계의 심연에 이르는 한 방법인 동시에 그것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미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의 예리한 감각과 섬세한 감성은 모순과 역설 같은 시적 형상화의 원리를 통해 구현될 때 한 편의 시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시와 관련하여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말이지만 신인의 경우 이것을 망각하거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면서 언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실들을 망각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데에는 그만큼 그것을 온전히 소화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인 것이 제대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그가 보여준 시편들은 이 기본적인 것들을 그 나름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든든하다. 하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참신함과 낯설음의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안을 온전히 떨쳐버릴 정도로 일정한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익숙한 새로움' '새로운 익숙함' 이라는 모순과 역설이 그의 시에서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미적 긴장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시인이 고민해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선정위원: 이재복 한양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