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의 詩 文學
고양(高揚)된 존재론적 언어 / 이만섭 본문
고양(高揚)된 존재론적 언어 / 이만섭
소설의 허구에 반하여 시의 진실성은 자신을 쓰는 문학이다. 시의 언어는 나를 중심점으로 대상과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맞춘 ‘초점(焦點)’의 언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렇기에 대상에 대해 시인처럼 투철하게 파고드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특히 현대시는 언어를 가공하여 세분화 시키는 데 매우 능숙하다. 그렇기에 그 무엇도 시로 소화해낼 수 있는 변용의 능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엄격한 시적 범주를 요구한다. 이제 우리는 가설의 말에 골몰하지 말자. 예컨데 시란 무엇인가 라는 애매한 질문보다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차라리 그때그때 나를 새롭게 드러내는 성찰의 언어로 대체했으면 좋을성 싶다. 그것이 곧 시인에게도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쓰는 문제에 천착하는 일일 것이며, 비록 독자에 대한 배려가 미흡할지라도 다양한 변용의 이미지 뒤에 숨은 시를 찾는 독자의 상상력은 새로운 차원의 소통을 시도할 것이다. 그들의 포기하지 않는 지문 찾기, 그것이 시의 참다운 향유일 것이다.
두레문학 2009, 10호에 실린 글들을 읽고 느낀 점이라면 고양된 존재론적 언어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시단」에 상재된 몇몇 시편들을 통해서 들여다볼까 한다. 현대시가 정체성의 문제에 고민해 온 일은 어제오늘이 아닐 터지만 그것은 존재의 사유를 통해 해결하지 않고 감수성 같은 피상적 정서에 집착하다보니 객관성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시인에게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물론 이미지의 흡수 경로가 외피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외피의 감수성이 내부의 의미체계를 약화 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두레문학 통권 10호「시단」의 시편들에서 엿보이는 점은 새롭게 모색된 점은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가 아닌가 싶다.
모든 대상은 상응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시인의 눈은 이것을 찾는데 자기만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는 보들레르가 말한 만물조응(萬物照應)의 이론과도 부합된다. 곧 ‘물상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물상이 아니며 그 배후에 숨겨있는 이상적 형태의 상징인 것이다’라는 것이다. 시인에게 존재라는 것은 있음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그 내면의 감정과 사상이 상관물과의 교감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데아일 수도 있고 초월의식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성의 문제일 것이다. 존재는 그 생성된 언어의 중심에 놓이는 것이다.
1) 존재, 유추의 주변
어두워지는 저녁 숲에 남은 햇빛이 비치는 것에 대하여, 그 빛 아래서 은사시 나
뭇잎들 반짝이며 제 몸을 뒤집는 것에 대하여
혼자 듣는 시냇물 소리에 대하여, 그 물소리 어떻게 저무는가에 대하여
시냇물소리 내 몸 구석구석이 다 저문 뒤까지 흘러
서늘한 저녁물빛이 되는 모양이라든가 그런 슬픔이라든가
슬픔보다 더 길게 개망초꽃들이 자라고 있는 것 그 개망초꽃들 하얗게 흔들리는
난동에 대하여
간간이 들리는 지빠귀 울음소리의 아득한 고적감이나
여뀌 풀 더미에 얹히는 여뀌 꽃 색깔이며 그 여뀌 꽃의 그늘 빛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어두워지는 저녁 숲에서 내가 혼자 저물고
한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 어떻게 긴 기도인가에 대하여
유현숙 「저녁 숲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들」 전문
저물녘의 심경을 귀엣말로 풀어내듯 유현숙 시인의 시상의 오브제들이 나직하다. 이 시를 읽고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는 모티브가 정적이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선험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빛이 멀어져가면서 고즈넉하게 다가오는 저녁 숲,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오롯함이 시인을 잔잔하게 한다. 화자를 반경으로 비춰오는 것들은 한편은 일상을 등지는 빛에 대한 연민이며 아쉬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무들 끼리 모여 어둠을 맞는 저녁 숲의 정경은 아득해지는 대상과 서성거리는 자아를 동질성으로 묶어놓고 있다. ‘ 내 몸 구석구석이 다 저문 뒤까지 흘러’ 어둠과 더불어 아득해질 때까지,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내 몸 구석구석을 차지하듯 비춰온다. 이럴 때 독백은 유형의 대상을 통해 이끌어내는 공시성이 화자의 마음을 드려다 보게 한다. 화자는 그것을 통해 자아에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별성은 사소하지만 따뜻하다. 저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의 풍경으로 그려지는 것들을 통해 빛이 소멸해가는 저편의 것들을 다독여 주고 싶은 시인의 따뜻한 사유가 정갈하다. “남은 햇빛이 비치는 것에 대하여”라는 이쯤의 시간은 시시각각 모든 대상에 대한 변주를 알린다. 은사시나무가 반짝이는 것에 대하여, 시냇물이 흐르는 것에 대하여, 그 개망초 꽃을 지나 지빠귀 울음소리의 아득해지는 고적까지, 시각 다음에 청각, 청각 다음에 어둠이 잠식한 뒤 시각과 청각이 집합되어 보이지 않는 유기체로 남는 풍경의 사유까지 껴안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어두워지는 저녁 숲에 나도 혼자 저물고` 독백이 기도처럼 오롯해지는 시간이다.
내 아내 이름은 월선이다 내 어머니 이름도 월선이다
방파제 벽에 [월선 조업 금지] 문구가 붉은 깃발처럼 펄럭이던 시절 옆집 개똥이 아버지가 발동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월선하여 죽을 때까지 피똥을 쌌다
줄줄이 딸 여섯을 엮은 어머니는 육이오 때 남으로 월선하여 금쪽같은 장남을 낳고 내 아내도 월선하더니 한방에 아들을 낳아 딸 부잣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바다에도 선이 있는지 바다에 선을 어떻게 그을 수 있는지 어린 나는 개똥이 아버지가 골병든 것보다 기실 그게 더 궁금하였는데
선을 함부로 넘으면 안 된다는 것 죽는 수가 있다는 걸 나는 일찍 알았는데 더러는 그 죽음 같은 선을 넘어서 영원히 사는 그대
박봉준「월선」전문
시란 언어의 도구로만 머무르길 거부한다. 평서체 문장일수록 이미지의 변화를 꿈꾸어야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사유가 거처하는 내면의식으로 시의 깊이를 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내도 어머니도 숙명처럼 지닌 채 살아가는 이름이 월선이지만, 파도가 몰아치는 방파제 벽도, 바다 저편도, 넘어서는 안 될 월선이 되고 있다. 그것을 넘을 때 이름이 갖는 금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생의 행로는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되어 심신을 뒤채이게 한다. 그러나 아내와 어머니는 신성불가침의 경계선이었기에 아내도 어머니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운명을 따르며 생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넘었을 때 그 경계가 얼마나 단조로운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행여란 도처에 선을 넘고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월선은 우리가 걷는 보폭의 앞이거나 뒤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박봉준 시인의 시적 대상은 기실 월선하지 못한 이편의 불합리를 그대라는 대명사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아, 내가 진실로 가벼웠다면 돌이 되었을테지
돌이 되지 못한 게 억울하지도 않은 건
가벼운 바람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라
그 일이 견디기 어려워 칼을 물고 우는 것이라
그와 함께 흘러가겠네
냇물을 이끌고 바다로 가는 꿈길을 열어준다면
가벼운 것들은 예쁘고 무거운 것들은 고맙고
바람은 갈 길을 알고 돌들은 있어야할 곳을 아는 바다로
아, 내가 진실로 무거웠다면 바람이 되었을테지
바람이 되지 못한 게 억울하지도 않은 건
돌멩이처럼 제 자리도 지키지 못했음이라
그 일이 무서워 맨몸을 보여주며 우는 것이라
그가 악마라도 손을 잡겠네
까무룩 꺼져가는 영혼의 귀에 달콤히
음악의 시를 속삭여 준다면
술통 같은 내 가슴통에 구멍을 내고
그의 입술을 나의 피로 적셔주겠네
김현철「돌멩이의 꿈」전문
시인은 역설을 통해서 언어를 효용의 인식으로 대체한다. 좋은 시에 있어서 이미지화란 화자의 욕구를 미학적으로 전환 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좋은 시라는 말은 공감을 뜻한다. 시인은 돌멩이라는 사물에 융화되어 내면을 반추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가벼웠다면 돌이 되었을 테지, 내가 진실로 무거웠다면 바람이 되었을 테지’ 라는 가정의 서술은 존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그럼으로 미증유의 현실적 문제들을 풀어가는 화자의 유추는 당위적일만큼 포괄적이다. 김현철 시인의 돌멩이는 자아를 통해 대상을 재듯 무게를 재는 듯하지만 이것은 곧 자신의 존재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시는 돌멩이를 통해 가벼움의 속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돌멩이를 허공에 던졌을 때 날갤 달고 나는 것을 보지 않던가, ‘ 가벼운 것들은 예쁘고 무거운 것들은 고맙고’ 그러나 정작 자신은 바람도 되지 못해 맨몸을 보여주려 한다. 세상의 가벼운 것이란 무엇일까, 존재의 자리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돌멩이라 할지라도 바람보다 가볍다 할 것이다. 음악의 시라도 속삭여 준다면 무직한 가슴에 동공을 내 허공에 띄우리라. 이렇듯 화자는 존재의 고양된 가설을 놓고 있는 것이다.
2) 존재, 상징의 주변
집을 보러 갔어요
방은 3칸, 화장실은 2개
여자 치마폭에 숨은 소년의 까만 눈이
안방에서 거실로 세탁장으로 안내를 해요
이 집 안 주인은 결벽증이 있는 여자군요
침대 시트며 커튼이 온통 하얀 빛이에요
남자는 그런 여자를 지겨워 하나봐요
서재는 온통 어질러진 책
나는 베란다를 통해 건너 산을 바라보며 물어요
어디 새는 곳은 없나요?
여자와 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벌써 알지요
욕실 세면기에서 똑똑 여자가 떨구는 눈물,
고경숙 「집구경」 부분
며칠 째 초인종 눌러도
인기척 없고
비-인? 마당으로
신문 값
우유 값
가스검침 비
각종 고지서가 수북 쌓인 채
총총 돌아서는
발걸음 뿐
.............
그래도 그 집
담장아래
한그루 혓바닥
붉게 자라고 있지
권주열 「그집」 부분
돌계단을 오르자 대문이 열린다
대문 한 켠 수십 년 된 감나무 아래
오월 꽃그늘이 달 포 된 강아지를
포록포록 재우고 있다
사랑채 건너 머언 뒤 켠
느티나무 옹이,
오도카니 가지 친 이파리에 쌓여 익숙하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들
고물고물 육 남매 바람 잘 날 없었던 곳
할머니 관절염 앓기 전부터
처마 밑 넓적하게 둘러앉은 독
옹진 가슴에 불길 잡으려 묻어둔 곳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
할아버지 바빠진 손길이 일군
앉은뱅이 나무의자
둥근 독 속의 비친 파랑들을 기억한다
한영채 「드므가 사는 집」 부분
여기 등장하고 있는 집들은 화자의 흉중에 거처하는 비례적 공간이다. 대상을 내세워 의식을 구상화 하고 있는 정신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고경숙 시인은 그런 관점에서 집구경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자뿐만일까,(남자도 예외는 아닐 테지만) 집은 최소한의 가정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집에 대한 우리의 현실이 마음과 같지 않아 갈등에 시달릴 때가 적잖다. 그뿐 아니라도 단 하루를 살아도 집이란 가정의 개념이 존재하는 생의 공간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벽증의 안주인, 그러면서 온통 어지러진 서재, 그런 생활공간이라면 본디 찾고 있는 집은 아닐 것이다. 화자의 정체성은 환유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것은 존재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마음 같지 않다. 따라서 여기의 집은 존재를 규정 짓는 것이며 그것이 더구나 건물의 하자보다는 마음의 하자를 통해 환기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참다운 가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집이란 언제나 집약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주열 시인이 그려놓은 ‘ 그집’은 삶의 거처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부재를 통해서 삶의 단편들을 들여다보게 한다. 마룻바닥에 쥐오줌 눕고 벽장에 좀벌레 서식하는 침묵만 흐르는 존재의 집에 총총 돌아서는 것은 발걸음뿐이라고 규정짓는 쓸쓸함이 부재의식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그렇다, 일상이 숨 쉬는 집이 삶의 처소를 잃었을 때 우리의 존재감은 얼마나 황망한가, 빈 마당에 잡풀 우거져 이끼 낀 토방이며 덩그마니 누워 있는 툇마루 문창살에 밤이면 비키는 달빛도 조등처럼 애처로워 보일 것이다. 그 허접스런 삶을 무슨 말로 견줄까, 따라서 시인의 `그집`은 존재의 부재에 대한 서술이며 우리 삶의 유기성의 결핍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늦봄 한낮일까, 햇볕 가득한 양지에 옛집의 향기가 고스란하다. 한영채 시인의 ‘ 드므가 사는 집’ 은 마음을 웅숭깊게 하고 있다. 모든 옛것이 다 사라지고 회상처럼 아련히 자리한 드므, 옛집에 갇혀 살기로 하면 천 년 뿐일까, 그러나 한 편은 노부부의 삶의 모습과 찬찬히 오버랩 된다. 육남매 키우며 바람 잘 날 없었던 곳이 고즈넉해져서 어느덧 느티나무 옹이처럼 양지에나 주저앉아 있어야 할 운명에 놓인 저‘ 둥근 독 속에 비친 파랑들을 기억하는’ 생이라면, 회상을 불러 모으고 사는 노부부의 삶이 자분자분하다 .
시에 있어서 상징은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활이나 삶 속에 투영될 때 그 이전에 이미 통절한 삶의 모습이 자리했던 것이다. 고경숙 시인의 ‘ 집보기’ 에서 집이 상징하는 가정(家庭)이랄지, 권주열 시인의 ‘ 그집 ’ 에서 집이 상징하는 부재의식이나, 한영채 시인의 ‘ 드므가 사는 집’ 의 울타리 안이 각기 시인의 존재와 유기적인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말라르메가 제시한「 내가 (꽃)이라고 말할 때 나의 목소리는 분명한 윤곽을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잊어버린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꽃과는 상위(相違)한 현실이 어떤 꽃다발에도 없는 향기로운 꽃의 관념 그 자체가 음악적으로 떠올라 오는 것이다.」라는, 손에 닿지 않는 관념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내세운 상징이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놓이는 이유도 경험이 아니고서는 들어설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3) 존재, 개성의 주변
세상의 고비에서 가장 편한 곳이 어디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머리카락 솎아내는 바람의 손놀림이
한 번도 중심을 벗어난 적 없는
달팽이관이 환해지는 길
파르스름한 가마가 열리는 길,
버드나무 잎을 헤아리다가
연못 속 금붕어 소리를 빨아들이는
나비들의 춤사위가 시작되는 곳이라지요
아메리카커피 향이
잡담처럼 술술 풀려나와
세상에 하나 뿐인 모자를 완성하기 위한
새의 호로록거림이, 저만치
오는 외로움 훠이훠이 내?는
노루걸음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버들피리 부는 곳이라지요, 저만치
오는 두근거림이, 까만 머리카락의 물결이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선택된 잎들이 단아한 몸매가 될 때까지
휘파람을 부는 곳이라지요,
온전한 나무 하나가 완성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거울이 되는 것이라지요
이민화 「 버드나무미용실 」 전문
여자들에게 있어 미용의 문제는 의식주에 버금가는 문제다. 물관이 길러낸 버드나무 낭창낭창한 머릿결을 매만지는 바람손이 보일 듯 말 듯, 이민화 시인 특유의 맛깔스런 언어감각이 빛난다. 이 시를 읽고 나니 마음도 시제처럼 유연해지며 저절로 리드미칼하다. 풍경의 서사는 마치 시인이 부드러운 손길로 시선(視線)을 간질이듯 색다른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 꽃단장한 후두티라도 날아왔는가. 미용실은 물가의 카페가 된 듯 어느결에 가르마를 열어젖히는 가붓한 명지바람으로 풀어내는 언사가 아기자기하다. 그러나 물가의 버드나무는 갈대밭에서 건너온 비비새들의 수다가 재격이다. 자연을 들여놓는 개성 있는 존재들의, 세상 이야기 빵빵하게 풀어내는 휴식공간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외로움도 잊다보면 드디어 완성되는 머리, 더러 흥에 겨워 제 맵시 짓고 단아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미용실 문을 나설 때 페미니즘이 압권이다. 그럴 때 버드나무가 있는 공간도 당당히 세상 속 풍경의 거울이 된다.
아니 어쩔라고 그런다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다들 아랫도리 빳빳이 힘주고 섰는디 그것도 길간디 말이여 넘들 뻔히 보는디서 팍 나자빠져 있으면 워쩌냐고 뒷집 할매 말마따나 비도 서푼어치베끼 안왔는디 그까짓것 갖고 자빠진다냐 아무래도 안되것다잉 시방 내가 가갓꼬 인타부 조까 해봐야 쓰것네
아 내 맴이여 왜 근디야 자빠지고 싶어 자빠졌당께 집이도 여그서 자빠져 있어봐 질가 코스모스덜 빤도롬히 서갓꼬 냄시를 살살 풍기?제 한나절에도 몇 번이나 꼭지다방 김매담이 그 쪼간 오토바이에 함지박만한 궁뎅이를 걸치고는 젖통을 덜그럭덜그럭 연지 삘게 갓꼬 댕기?제 자빠져 있을만 허당게
아따 참말로 질도 여럿질인게 허고자픈대로 혀봐 이 몸은 구경 조까 헐라네 그나저나 이장댁 허리 조까 아프겄네잉 자네 아랫도리 작신 분지를라면 말여 아까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면서 그러는디 오늘내일 중으로 때도 모르고 자빠져있는 것들 아랫도리 치러온다 하니께 인자 김매담 궁둥짝 어지간히 쳐다보드라고
어따메 겁나부리네잉 자네나 나나 가기는 매한가지 아닌개벼 내가 자빠져있어도 볼태기에 살이 도도록 올랐잖여 자네 손으로 한번 훑어봐 나락알갱이가 한 웅쿰이당께 이 몸으로 말이여 김이장 막내놈꺼정 실컷 먹일 참이여 그러는 자네는 날마다 달마다 시인가 거시긴가 쓴답시고 온천지로 쏘댕김시롱 일일이 참견인디 그래 그 성한 몸으로 시는 제대로 맺어봤는감 아님, 씨라도 제대로 맺어봤는가
정미정 「 전라도 만담」 전문
시를 쓰는 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시를 읽는 데도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정미정 시인의 전라도 `만담`이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 요설체 문장으로 시적 변모를 보여주는 시의 한 전형이다. 우리의 언어가 이처럼 법(표준어) 밖에서 법(형식)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데는 구어체의 시에서 유난히 두드러진다. 만담의 역설은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때로는 태연자약하게, 때로는 거침없이, 입담의 힘을 빌려 의미를 펴는 것이다. 그런 것이 사투리의 힘일 것이다. 이 시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상황을 풍경처럼 읽어준다. 오목조목 다듬어진 말솜씨의 구성이 갈마들린 듯, 말은 농익어 단내가 난다. 아마도 방언에 대한 시인 관찰의 노력도 컸으리라 본다. 그런데 이런 구어체의 시에서는 화자가 좇는 이미지가 유실될 우려가 높다. 독자는 만담을 읽는 즐거움으로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추, 개성, 상징,이라는 나름대로 규정으로 텍스트를 빌려보았다. 시인은 어쩌면 예언자이며 초월자이기도 하다. 그가 이상세계를 투시하는 혜안일 때 그 언어들은 오래토록 행성처럼 빛을 낸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오늘 우리(시인)가 쓰는 시들이 자연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시 스스로 생명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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