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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서정(抒情)과 묘사(描寫)에 대하여 / 이만섭 본문

시 읽기, 기타

서정(抒情)과 묘사(描寫)에 대하여 / 이만섭

이만섭 2012. 1. 23. 16:08

 

서정(抒情)과 묘사(描寫)에 대하여 / 이만섭

 

 

 

1. 筆意와 詩意

 

소식이 왕유의 시 “산거추명(山居秋暝)”에 대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한 말은 서정과 묘사의 관계를 극명하게 조명한 말이기에 오랜 세월 회자되는 게 아닌가 싶다. 시나 회화가 서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묘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묘사다운 묘사란 서정의 개념을 화자의 정신에 담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시에 있어서는 대상을 이미지화한 부분을 정제하여 언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대상을 통한 시정신에 대한 밑받침이 중요하다. 따라서 모티브가 전제되지 않는 이미지는 시도 그림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소식은 왕유의 시에서 그 점을 읽은 듯싶다.

 

무릇 시의 출발점은 감흥의 발현일 터인데 감흥이란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고 있는가 하는 의미의 해석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해석이라는 말은 논리와는 무관하다, 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치를 증명하는 행위이기에 자칫 대상에 대한 설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더욱 시다운 모습을 지닌다. 그렇기에 시가 언어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문학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식은 왕유의 시에 대해서 왜 이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까,

 

인적 없는 텅 빈 산에 비가 그치니 /늦가을 날씨는 더욱 더욱 쌀쌀하고, /소나무 사이로 밝은 달빛 비치니, /맑은 샘물은 바위 위로 흐르네. /대숲 서걱거리는 소리에 아낙네들 돌아가고 /연 잎 흔들리니 고깃배 내려가네. /봄꽃이야 시든지 오래이건만, /그런대로 이 산골에 머물만하구나.(원문: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이 오언율시(五言律詩)는 비 온 후 산촌의 가을저녁 풍경을 읊고 있지만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듯 자연(풍경)을 회사(會寫)를 해놓고 있다. 소식의 말대로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그대로다. 그러면서도 풍경 뒤편에 감춰진 이미지까지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가을비 그친 대지가 완연한 초겨울로 접어든 가운데. 가을날의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한 쓸쓸함이 고즈넉하다. 풀들은 이미 말라버렸건만 건들바람에 사붓대는 대나무 소리, 물소리 들으며 맑고도 그윽한 달빛이 소소하게 비치는 시골 저녁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지간에 봄꽃은 없더라도 산중에 머무는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 라는 은일자의 모습으로 왕유 자신을 비춰낸 이 시의 함축성은 궁핍한 심경의 묘사를 통해 넉넉한 서정의 아름다움을 발현시키고 있다. 왕유의 필의(筆意)를 통해서 소식은 시의(詩意)를 얻고 있는 것이다.

 

 

2. 意味와 解釋

 

인왕제색도*를 보다      

  

 

산이 폐부 깊숙이 운무를 드리웠다  

견갑골 아래 반쯤 가린

비 갠 윤오월의 산색이 더욱 현묘하다  

필시 한바탕 소나기에 감흥이 일어  

천만 년 적묵법으로 정좌한 산의 자태가  

바야흐로 농묵의 때를 얻은 것이다  

골마다 질탕치는 물소리에 금강심으로 발원한 붓끝은  

도끼날로 장작을 팬 듯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내린 듯  

육신의 거처에 음각을 하고  

수묵의 필의를 산골짜기에 비장하였다   

송림 사이로 드러난 산가의 지붕에도  

현현하게 배어든 산기운은  

낮게 드리운 하늘을 이고 잿빛 궁륭을 머금었는데  

노구의 벗은 여태도 보이지 않고  

비탈에서 마중하는 처마는 산제비라도 날아오를 듯

허공을 향해 곧게 뻗었다  

무심한 세월에도 변치 않고 굳건히   

자연으로 순명해 갈 때까지  

정녕 이 한때, 인왕의 흰 산의 품에  

그대 묵적하자는 것인가,    

 

* 정선의 산수화

 

 

필자의 이 졸시의 모티브는 물론 시제 그대로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仁旺齋色圖)”다. 호암미술관에서 처음 본 “인왕재색도”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진경시대의 대표적인 산수화라는 점은 차지하고라도 수묵에 다섯 가지 색이 있다지만 몰골법으로 그려진 수묵기법은 종래의 전통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담한 파격이었으며 그 변화무쌍한 구도는 신묘하기까지 했다. 창윤한 묵색의 기운은 금세 옷자락이라도 젖어올 듯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안개가 감상의 시선을 압도하는데 배관하는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화가는 왜 저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낯설음으로 그림의 배경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 ’진경시대의 산수화 전‘라는 어느 기획 전시회에서 다시 감상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게 아니고 그림 속에 이미지화한 다른 사의(寫意)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림의 배경에는 당대의 문장가이며 시인이던 화가의 외우 사천 이병연이 있었던 것이었다. 사천이 병석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벗의 쾌유를 위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뜻에서 바라본 그림은 곧 수묵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쓴 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겸재의 그림과 사천의 시의 관계는 겸재가 그림을 그리면 사천이 시를 짓고 사천이 시를 지으면 겸재가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두 사람의 시와 그림이 서화동원(書畵同源)이란 말을 헤아리게 한다.

 

시에 있어서도 서정의 모티브가 묘사를 핍진하게 하는 경우는 이처럼 무한한 감동을 준다. 여기서 화가는 무슨 연유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 하는 그 동기부여가 필의(筆意)를 다지게 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인데 어느덧 문장으로 읽히고 시로 읽히는 것이다. 감동이 감동을 낳듯이 필의(筆意) 속에서 시의(詩意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막연히 좋은 시를 찾아 나서기 일쑤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으며 어딘가에 단지 좋은 시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떠있는 경우다. 시인에게 가장 두려운 약점이란 그처럼 시를 선험적으로 쓰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경험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탁월한 발상이라도 경험을 통해서 얻어야 진정한 시일 것이다. 경험을 존중한다는 것은 적어도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를 통해서 고결한 인격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그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경우라도 화자가 경험을 담아내는 정신이 시다운 시를 낳는 바로미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시가 진정한 삶을 노래했을 때 희망 아닌 절망일지라도 그것이 경험에 충실한 묘사라면 훨씬 드높은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타인의 경험을 제 것인 양 차용하고 융합하는 관념적이고 주정적인 시가 감동을 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3. 表現과 克己

 

시의 궁극은 어떤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상을 직관의 뒤에 숨겨놓고 스스로 좇아가서 찾아내듯이 누가 탐내는 것도 아닌데 주체와 대상이 충돌하는 방식으로 저 혼자 꾸미고 작란하고 이용하고 애착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이 시의 서정이며 시의 내재율이다. 그렇기에 모든 시들은 그런 방황으로부터 획득한 산물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불가해한 아이러니다. 그러면서 모든 시들은 상관물에 대한 의미를 짓는 도정이다. 그러나 절망조차도 애착으로 바라볼 때 시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싹틔운다. 서정은 모름지기 그것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어떤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시를 통해서 단죄하고 신천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시의 표현이다. 좋은 시란 문장 안에 의미와 리듬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사의 지록위마는 억지이며 절대모순일터지만 시의 지록위마는 표현이 극기한 새로운 언어의 영역인 것이다. 그것을 묘사하는 것을 설득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샤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비존재라는 것은 실현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이미 실현되어 있는 것을 거부케 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뜻한다고 말했듯이 좋은 시란 서정을 드러내는데 있어 사물 밖에 숨어있는 것을 묘사해야 한다. 그것이 시가 지닌 힘이다. 시가 시다워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