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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의 詩 文學

[스크랩] 자아(自我) 속의 탈자아(脫自我) 찾기 /小澤 장대연의 詩 본문

시 읽기, 기타

[스크랩] 자아(自我) 속의 탈자아(脫自我) 찾기 /小澤 장대연의 詩

이만섭 2008. 3. 3. 12:36

 

 

자아(自我) 속의 탈자아(脫自我) 찾기 /小澤 장대연의 詩

 

 

                                         이만섭

 

 

글을 쓴다는 일은 마음의 행위다. 곧 자신의 언어행위다. 그렇기에 무심코 지나칠

일상의 이야기라 하드라도 곧잘 자신과의 싸움으로 비유되곤 한다

하물며 시에 있어서는 쓴다는 개념 보다는 오히려 짓는다는 축조술의 개념으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싸움이 늘 그렇듯이 모험이 뒤따른다.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적어도 시에서는

메마르고 푸른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내하는 어려움이 사뭇 진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가 길로 놓인 경우, 가까운 거리에서 부터 아득한 여정에 이르기까지 길의 형태는 다양하다.

요소요소마다 장애물이 도사리고 짧은 시편조차 완성해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 시이고 보면

시쓰기은 어려움은 비단 어찌 필자 뿐이겠는가,.

 

소택 장대연의 시에서는 시의 모습들이 탈자아(脫自我)의 개념으로 놓여지고 있다.

기꺼울 수는 없겠으나 개연성보다는 의지로운 필연적인 모습들이 시인이 쓰는 시의 주변이다.

말하자면 체험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환경을 만들어간다. 얼핏 사서 고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점이 장대연의 시가 특장으로 내세울 수 있는 연역적 구성법이다.

곧 그의 시는 논리적인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논리와 시는 별개의 차원이지만 하찮은 소재라도 뚜렸한 주제의식을 갖고

풀어 쓰는 의미전달의 기법이 돋보인다. 이것은 그의 시가 존재하는 분명한 명분이다. 말하자면

글쓰기의 한 기술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시란 언어의 연결고리로 피어내는 의미의 산물이다.

이념의 세계에 생명을 부여해서 탄생하는 것이 바로 시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대연은 자아(自我)로부터 체험을 끌어들여 탈자아(脫自我)를 통한 유추의 형식을 쓰고 있다.

 

       

                   

쉿!

지금 저 밤나무 숲에선

근엄한 태양의 집전(執典)하에

가을바람 증인으로 모셔

성스런 출가 의례 중.

 


조용!

모진 풍상 속 단심으로 벼린

수백의 창 거머쥐고 지켜낸

자식들과 마지막 포옹을 한

밤송이들이 앞 다투어

배를 가르는 숭엄한 순교 중.

 

머뭇거리던 붉은 아람들의

결연한 낙하 뒤의 운명이

청설모 밥 地上이 될지

부활의 땅 地下가 될지

그야 하늘의 몫일 테지만


후훗!

그 아래서 덤으로

인생 한 알 줍는 행운은 내 몫.

 

                      -횡재(橫財 )-

 

 

위는 장대연의 최근 시 "횡재"의 전문이다. 화자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신은 태초에 이 땅에 생명을 내리고 인간으로부터 그것을 인식케 했다.

자연이 치루는 의식의 하나인 가을이 결실을 보여줌으로서 풍요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엄연히 말하면 자연 앞에서 이것은 호불호를 떠나 숙명적이다. 모진 풍상 속에서 이루어 낸 결실,

그럼에도 시인은 스스로 인생 한 알 줍는 행운의 몫으로 규정짓고 있다. 이름하여

한 알의 밀알이라도 썪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썩어 싺을 틔우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요한: 12장24절)는 성경의 구절을 빌리지 않아도 바로 생명의 나무가 아니던가.

신생을 얻는 기쁨을 횡재로 그려놓고 있다. 긍정의 사유가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이렇듯 장대연의 시는 형상을 탈자아의 개념으로 놓고 의미를 보여준다.

 

              

어지러운 角의 검무 속에
빌딩 숲 전장을 갈팡질팡하며
어제 그제처럼
오늘도 생살의 일부를 헐어낸
메트로폴리탄 전사들
어둠 속 무디어진 角을 비집고
상처투성이 부상병 되어 귀대한다.


살판 난 도회의 조명빨에
쉬이 꺾이지 않는 콧날 세운
角의 여전한 예봉을 피하기 위해
질끈 눈 감고 돌이 된 후에야
無光이 빚어낸 無角의 공간 속에
식은 땀 훔치고 심호흡해보지만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불안한
角의 지뢰밭 한복판에 갇힌 채 
미동조차도 할 수 없는 부상병은
차라리 뜬 눈의 밤샘 투병을 택한다.

 

                          -각(角)의 포로-
 


 

이 시를 읽고나면 괜히 마음이 긴장한다. 끝 연이 서술한 바와 같이

각의 사위에 눌린 듯, 사뭇 지뢰밭 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심신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시다.

우리의 삶이란 타원형의 세상이라는 공간 속에서 각에 예속된 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 탐미적인 관찰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욕망이 불러낸 위기는 도처에 산재한다.

본시 둥근 이 자연 속에서 각은 그 둥근 것이 만들어낸 도형이다. 다시 말해

삶이 피조한 것들은 어쩌면 파우스트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곧 그것(장애물)으로 부터

싸워 이겨내는 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고보면 구원이란 말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련의 상대적 가치 위에서 보여지는 문학이 우리의 영혼을 성숙하게 한다.

 

장대연의 시에서 주문하고 싶은 말은 시의 깊이 많큼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길 바란다. 말하자면 시의 조응관계(照應關系)를 보이는 일이다.

본래 이 말은 상징주의 시학에서 보여지는 말이긴 하나 이것은 화자와 독자의 역학관계의

본질적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은 반사의 빛으로 그 생명력을 얻는다.

시를 쓰는 시인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될 터이지만 이는 분명히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시가 시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긴요하다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장광스런 테크닉이나 미학적인 수사가 오히려 시적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곧 시란 지식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강물 위에 풀어지는 색감처럼

고통의 모습조차도 내 안의 깊이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화해의 모습일 때만

시는 독자에게 진정한 성찰의 언어로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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